영화의 실제 인물은 김구, 김원봉 둘 뿐이니 살아있는 모든 부일매국노도 영화에 대해 거부감 가질 것은 없다.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앞으로도 그리 살아갈 수 있다.
김원봉 알아보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1908년 보통학교 2년에 편입하였으며, 1910년에 인근 동화중학(同和中學) 2년에 편입하였다. 1913년에는 서울의 중앙학교에 다니기도 하였으며, 1916년 중국에서 독일어를 배우기도 하였다.
1918년에는 김약수(金若水)·이여성(李如星) 등과 난징(南京)의 진링대학(金陵大學)에 입학하면서 중국에서 망명 생활을 시작하였다. 3·1운동의 소식이 전해지자 귀국하는 김약수·이여성 등과 헤어져 길림(吉林)을 거쳐 서간도에서 폭탄제조법을 습득하는 등 일제와의 무장투쟁노선을 분명히 하였다.
1919년 12월 윤세주(尹世胄)·이성우(李成宇)·곽경(郭敬)·강세우(姜世宇) 등과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고 의백(義伯: 단장)에 피선되었다. 의열단의 암살대상은 이른바 칠가살(七可殺)에 해당되는 자들로서 조선총독 및 총독부 고관, 군부 수뇌와 매국적 친일파 거두 등이었다. 그들은 본거지를 만주와 상해·난징 등지로 전전하면서 국내의 경찰서 폭파, 요인 암살 등 무정부주의적 투쟁을 지속하였다.
6년 여에 걸쳐 의열단 단장으로 대규모 암살계획 및 경찰서·동양척식주식회사 등에 대한 폭탄 투척사건 등을 배후에서 지휘 조종하며 테러에 의한 일제와의 투쟁을 지속하였으나, 연합투쟁 및 조직투쟁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5년에는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훈련생으로 입소하여 투쟁노선을 변경하였다.
1927년에는 중국 국민당의 북벌(北伐)에 합류하였고, 1929년 상해에서 정치학교를 개설하고 1932년 난징에서 조선인혁명간부학교를 창설하는 데 중국 국민당계의 도움을 받았다. 1930년경 북경에서 조선공산당 엠엘파(朝鮮共産黨ML派)인 안효구(安孝駒)와 제휴하여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결성하고, 레닌주의정치학교를 개설하고 기관지 『레닌』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1933년에는 대일전선통일동맹(對日戰線統一同盟)을 결성하여 혁명세력의 결집을 꾀하였다. 1935년에는 신한독립당·한국독립당·대한독립당·조선혁명당·의열단의 5개 단체를 규합하여 한국민족혁명당(韓國民族革命黨: 1937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칭)을 조직하였다. 1937년 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우한(武漢)으로 가서 조선민족혁명당이 중심이 되어 전위동맹·혁명자연맹·민족해방연맹 등 단체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여 대일선전전(對日宣傳戰)에 주력하였다.
1938년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동의를 얻어 조선의용대를 편성하고 대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장개석(蔣介石)의 주선으로 김구(金九)와 함께 각 혁명단체가 공동 정강하에 단일조직을 만들 것을 제의하는 「동지동포에게 보내는 공개서간」을 1939년 5월 발표하였다.
이러한 중국 국민당과의 관계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와의 합작노력은 최창익(崔昌益) 등과 달리 당시의 민족운동은 계급에 기반을 둔 공산주의운동이 아니라, 일본과의 투쟁을 위한 연합전선 결성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노선에서 출발하였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으로부터는 ‘소시민적 기회주의자이며 개인영웅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자신이 조직한 조선의용대의 대원들이 이탈하여 김두봉(金枓奉)의 독립동맹으로 흡수되기도 하였다.
1944년에는 임시정부의 군무부장에 취임하고, 광복군 제1지대장 및 부사령관 등을 역임하였으며, 1945년 12월 임시정부 귀국시에는 군무부장의 자격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전에 발표된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의 군사부장으로 명단에 올랐으며, 귀국 후 계속 환국한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좌우합작을 추진하였다.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주도하던 임시정부측이 좌우합작을 거부하자 비상국민회의에서 탈퇴하고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단의 한 사람으로 피선되어 임시약법기초위원(臨時約法起草委員)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6월에는 조선민족혁명당을 인민공화당으로 개칭하고 지속적으로 연합전선구축에 노력하였으나, 여운형(呂運亨)이 암살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본격화되자 월북하여 1948년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세칭 남북협상)에 참가하였다. 그 뒤 북한에서 국가검열상·내각 노동상·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하였으나 1958년 11월 숙청당하였다.
호 약산(若山). 경남 밀양(密陽) 출생. 1918년 난징[南京]의 진링[金陵]대학에 입학하였고, 1919년 12월 의열단을 조직하여 국내의 일제 수탈 기관 파괴, 요인암살 등 무정부주의적 투쟁을 하였다. 1925년 황푸군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을 지도하면서 중국 관내지역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하였다. 또한 중국국민당의 동의를 얻어 ‘조선의용대’라는 강력한 군사조직을 편성하기도 하였다. 1942년 광복군 부사령관에 취임하였으며,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을 지내다가 8·15 광복 후 귀국하였다. 1948년 남북협상 때 월북하여 그 해 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되었고 9월 국가검열상에 올랐다. 그 후 1952년 5월 노동상, 1956년 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1957년 9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였으나, 1958년 11월 김일성(金日成) 비판을 제기한 옌안파[延安派] 제거작업 때 숙청되었다.